유방과 더불어 진나라의 폭정을 종결시킨 초나라의 명장 항우는 오추라는 명마를 타고 다녔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오추는 원래 용이었다고 한다. 항우가 어느 마을을 지날 때 마을 사람들이 항우에게 사나운 말 한 마리를 잡아 줄 것을 요청했다. 커다란 호수에 살던 용이 어느 날 까만 말로 변해서는 농작물을 닥치는 대로 훼손할 뿐 아니라, 그것을 저지하려는 사람들마저도 상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얘기를 들은 항우는 “잘 되었소. 내 그렇지 않아도 타고 다니는 말이 부실하여 걱정하던 차였소”라고 말하고, 그 말을 제압하러 갔다. 항우는 저항하는 오추에 올라탔고, 오추는 항우를 떨어뜨리기 위해 하루 종일 용을 썼지만 결국 실패한 채 항우에게 굴복하고 만다. 항우는 그 말을 타고 무수히 많은 전장에서 역발산기개세의 용맹으로 패배를 모르는 용맹을 떨쳤다. 하지만 싸움은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유방의 참모이자 천재 지략가인 장량과 한신의 계략에 걸린 항우는 얼마 남지 않은 부하들과 자신의 애마 오추를 억지로 배에 태워 고향 땅으로 돌려보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 모습을 본 오추는 배 위에서 크게 울부짖고는 강물로 뛰어들었다.
사실과 허구가 적절히 섞인 이 이야기에서 이번 주제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점은 말이 자살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자살이라는 것이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상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흔히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이성의 존재 여부라고 한다. 이성의 반대 개념은 본능이다. 오직 본능에 따라서만 행동하며 살아가는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이성적 판단을 한다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결국 본능에 반하는 행동이 가능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야기는 성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경에 따르면 신은 만물을 창조한 후 6번째 날 자신의 형상에 따라 흙으로 인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에게 숨을 불어 넣었다. 이 숨이 바로 영혼이자 이성이 된 것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 영혼과 이성을 가진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인간은 다른 존재의 특징과 신의 특징을 동시에 가진 것이다. 인간의 육체가 가진 속성은 동물 및 무생물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관성의 법칙을 거슬러 자신의 몸이 공중에 떠 있기를 원한다고 해도 그것이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반면 우리의 정신은 그러한 모든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 오직 인간만이 이성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본능을 넘어서는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모두가 그러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맹자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지극히 미미하다”라고 말했다. 맹자에 따르면 그 미미한 차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올바로 발휘할 수 있다면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요, 그렇게 하지 못하면 짐승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인간이 짐승과 다를 바 없게 되는 것은 스스로 인간답게 되기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자포자기란 말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유전학상으로 인간과 유인원의 차이는 1%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99%의 공통점이 아니라 바로 그 1%의 차이점이다. 그것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 그것을 발휘할 수 있는가 여부에 따라 인간이 되기도 하고 짐승만도 못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성, 양심, 도덕성, 자유의지, 선의지 등으로 다양하게 부른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동물은 기계와 다를 바 없다. 기계는 함수관계에 의해 움직인다. 커피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밀크커피를 누르면 반드시 밀크커피가 나온다. 배고픈 동물에게 먹을 것을 주면 반드시 먹는다. 위험과 같은 다른 변수가 개입하지 않는 한 말이다. 배가 고픈 고양이가 주인이 없는 생전가게를 발견하면 양껏 포식한다. 발정기가 된 개가 자신보다 힘이 약한 암컷을 만나면 힘으로라도 제압하여 짝짓기를 한다.
이와는 달리 인간은 도덕적 가치판단을 통해 본능을 넘어서는 행동을 한다. 독립운동가들은 아무리 커다란 육체적 고통을 당해도 이를 악물고 참으며, 최소한의 도덕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배가 고프다고 해서 주인 없는 빵가게의 빵을 훔치거나 성욕을 느낀다고 해서 길가는 이성을 겁탈하지는 않는다. 반면 동물들에게 양심이나 이성적 판단을 기대할 수는 없다. 발로 찼는데 꾹 참고 “깨갱” 소리를 내지 않거나 스테이크에 침을 뱉어 주었다고 먹지 않는 개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맹자의 말을 빌자면, 인간이 본능적으로 원하는 것 중에 생명의 보존만큼 큰 것은 없지만 그래도 인간은 생명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물의 경우는 다르다. 대의명분이나 도덕적 가치를 위해 생명은커녕 그보다 훨씬 작은 욕구조차 포기하는 동물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스스로 생명을 마감하는 행위인 자살은 인간만의 이성적 가치판단 능력, 다시 말해서 욕구나 충동으로 대표되는 본능을 억제하고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능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렇다면 항우의 명마 오추가 자살을 한 것은 역사적 사실일까 아니면 허구일까? 혹은 <동물의 왕국>과 같은 프로에서 자살을 한다고 소개하는 사례는 진정으로 자살에 해당하는 것일까?
몇몇 학자들은 일부 동물들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언어생활을 하고 도구를 이용하는 등 문화를 향유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버가 댐을 쌓는다고 해서 비버가 문화적이라 할 수 없는 것은 그 방식이 백 년 혹은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본능을 넘어서는 인간의 활동은 언어생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logos라는 말이 언어와 이성, 그리고 논리라는 세 개념의 어원임은 많은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을 상징하는 언어 생활의 특징은 축적과 그것을 통한 발전이라는 데 있다. 언어와 문자의 발달을 통해 인간은 끊임없이 발전해 왔으며, 그것은 본능과 충동에 대한 극복 가능성이 더욱 커짐을 의미한다. 동물들이 설사 기초적인 언어생활이나 도구 사용을 한다 해도, 이러한 발전과 변화의 과정이 없다면, 비버의 댐 쌓기처럼 결국 본능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의미한다. 자살을 한다고 여겨지는 동물의 행동도 이와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긍정적인 단어는 아니지만, 자살이란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개념인 것이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서울대, 경기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다.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 ‘유학의 갈림길’이라는 두 권의 전문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 ‘포르노를 허하라’라는 대중 교양서를 저술했다. 현재는 저술과 더불어 로스쿨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dl-ciokorea@foundryc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