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인프라, 캠퍼스 네트워크, 스플렁크 시너지까지. 시스코의 지속 성장 전략이 본격화되고 있다.

시스코가 지난주 13일 2025 회계연도 4분기 및 연간 실적을 발표했다. 이번 실적은 시장 전망을 상회하는 ‘어닝 서프라이즈’로, 4분기 매출은 146억 7,000만 달러(약 20조 3,700억 원)를 기록해 시장 전망보다 5,000만 달러 높았다. 비일반회계기준(non-GAAP) 기준 주당순이익(EPS)은 0.99달러로, 월가 예상치보다 0.01달러 높았다. 2026 회계연도 1분기 가이던스는 146억 5,000만~148억 5,000만 달러로 제시돼, 시장 예상치인 146억 2,000만 달러를 웃돌았다. 시간 외 거래에서는 주가가 보합세를 보였지만, 올해 들어 시스코 주가는 약 20% 상승하며 지속적인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
이번 분기는 최근 몇 년간 시스코의 실적 발표 중에서도 의미 있는 전환점이었다. 앞서 열린 시스코의 연례 컨퍼런스인 ‘시스코 라이브’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신제품을 쏟아낸 직후였기 때문이다. 수치 자체도 긍정적이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2026 회계연도 이후 시스코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엿볼 수 있다.
이번 분기에서 눈여겨볼 주요 포인트 중 하나는 ‘9%라는 보안 사업 성장률’이다. 이 수치는 실제보다 낮게 보일 수 있다.
시스코의 보안 사업부는 이번 분기 19억 5,200만 달러(약 2조 7,10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전년 동기 대비 9% 성장했다. 이는 업계 주요 경쟁사들과 비교하면 낮은 수준이다. 이에 대해 모건스탠리의 니나 마샬 애널리스트가 투자자 대상 Q&A에서 질문을 던졌고, 시스코 CEO 척 로빈스는 시스코 보안 포트폴리오가 크게 두 가지로 구성돼 있다고 설명했다. 하나는 현재 투자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구형 제품군이며, 다른 하나는 XDR, SSE, 하이퍼쉴드(Hypershield), 신형 방화벽과 같은 신제품군이다.
신제품군만 따로 보면 매출 성장률은 20%에 달하며, 이는 순수 보안 전문 업체들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다. 또 다른 지표로는 미국 연방정부 부문을 제외하면 나머지 전체 비즈니스가 두 자릿수 성장세를 보였다는 점도 있다. 로빈스는 이와 관련된 구체적 수치도 제시했다. 예를 들어, 스마트 스위치 기반의 하이퍼쉴드 신규 고객은 80곳이며, SSE 신규 고객은 분기 내 480곳 이상이라고 설명했다.
시스코 보안 사업은 현재 대규모 전환기를 지나고 있다. 구형 제품 비중이 점차 줄어들면서, 시스코는 앞으로 꾸준한 두 자릿수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예상치를 뛰어넘은 AI 인프라 성장
시스코는 4분기에 웹스케일 고객으로부터 8억 달러 이상의 AI 인프라 수주를 확보했다. 이로써 2025 회계연도 누적 수주는 20억 달러를 돌파했으며, 이는 애초 회사가 예상했던 수치의 두 배를 넘는다. 수주 제품은 시스코의 넥서스(Nexus) 스위치, 광모듈, AI POD, UCS 서버, 실리콘원(Silicon One)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러한 성과는 시스코에게 매우 중요하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하이퍼스케일러와의 비즈니스가 거의 없었던 시스코가, 실리콘원 개발을 계기로 가격 대비 성능에서 경쟁우위를 확보하면서 해당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하게 됐기 때문이다. 시스코는 엔비디아와도 전략적 협업을 진행 중이며, 시스코의 실리콘은 엔비디아의 GPU 제품군인 스펙트럼-X(Spectrum-X)에 통합된 유일한 사례다.
하이퍼스케일 외 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AI 인프라 사업도 새로운 성장 기회로 떠오르고 있다. 로빈스는 “엔비디아와 공동 개발한 시스코 시큐어 AI 팩토리(Cisco Secure AI Factory)는 기업, 주권 클라우드, 신생 네오클라우드 사업자들을 위한 AI 데이터센터 구축 모델을 제공한다”라며 “2026 회계연도 하반기부터는 주권 AI 시장이 본격적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AI가 캠퍼스 네트워크도 바꾼다
지금까지 AI 기반 네트워크 성장의 중심은 데이터센터에 집중돼 있었다. 하지만 에이전틱 AI가 생성하는 새로운 트래픽은 캠퍼스 네트워크 업그레이드를 촉발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실적 발표에서 시스코는 챗봇 기반 트래픽과 에이전틱 AI 도입 이후 트래픽을 비교한 그래프를 제시했다. 이를 통해 대부분의 기존 네트워크 인프라는 에이전틱 AI가 생성하는 지속적이고 높은 수준의 트래픽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을 공유했다.
로빈스는 “네트워크 트래픽은 기존 챗봇 상호작용의 최대치를 넘어설 뿐 아니라, AI 에이전트의 지속적 상호작용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로 인해 요구되는 변화는 두 가지다. 첫째, 유무선 네트워크 모두에서 고성능 인프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둘째, 더 중요한 것은 AI 에이전트가 자율적 의사결정 및 행동 기능을 갖추게 됨에 따라, 전방위 보안 체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이다. 시스코는 최근 보안 기능을 통합한 스마트 스위치를 출시했으며, 향후 수년에 걸쳐 교체 수요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캠퍼스 네트워크는 시스코의 최대 사업 부문이기 때문에, 이 분야의 대규모 업그레이드는 시스코의 지속적이고 가속화된 성장의 새로운 발판이 될 수 있다.
플랫폼 효과, 시스코의 회복을 견인하다
시스코 전환 전략에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않았던 핵심은 ‘제품 중심 기업’으로의 복귀다. 2024년 최고제품책임자(CPO)로 임명된 지투 파텔이 추진하고 있는 핵심 미션이기도 하다.
파텔이 제품 전략을 총괄하기 전까지 시스코의 각 사업 부문은 개별적으로 움직이며 우선순위 충돌을 빚어왔다. 고객 친화적인 기업이라는 평판 속에서도, 고객 요구에 대응하다 보니 제품 로드맵이 자주 흔들리기도 했다. 파텔이 추구하는 방향은, 시스코를 하나의 제품 중심 기업으로 재정립하는 것이다. 로빈스는 이를 “시스코의 플랫폼 장점은 각 기술이 독립적으로 가치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객의 기존 투자에 시너지를 더해주는 데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전략은 실제 제품 발표에서도 드러난다. 6월 ‘시스코 라이브’에서 공개된 주요 제품으로는 보안 기능을 통합한 스마트 스위치, 네트워크 텔레메트리를 활용한 XDR, 시스코 협업 단말에 통합된 사우전드아이즈(ThousandEyes) 기반 사용자 경험 측정 기능, AI 캔버스 관리 도구, 시스코 전 제품에 공통 적용되는 AI 에이전트 등이 있다.
스플렁크 인수는 단순 매출 확보용이 아니다
시스코가 스플렁크를 인수했을 때, 시장은 이를 연간 40억 달러의 매출과 높은 마진을 확보하기 위한 240억 달러 규모의 재무적 거래로 평가했다. 하지만 시스코 경영진은 지속적으로 “매출 확대가 최종 목표는 아니다”라고 강조해 왔다.
실제로 최근 두 개 분기 동안 시스코는 스플렁크 기반 신규 고객 300곳 이상을 확보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큰 전략이 존재한다. 바로 시스코 전반의 제품에 스플렁크 데이터를 통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플렁크 데이터는 시스코의 보안 정보를 강화하고 있으며, 사우전드아이즈 및 앱다이나믹스(AppDynamics)와의 통합을 통해 엔드투엔드 가시성을 제공하고 있다. 올해 열린 NRF 행사에서는 소매 유통업체들이 스플렁크 데이터와 네트워크 데이터를 결합해 더 나은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는 데모도 공개됐다.
이는 시스코와 스플렁크의 결합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의 출발점일 뿐이다. 고객과 파트너는 앞으로도 지속적인 혁신 흐름을 기대할 수 있다.
관세 불확실성, 여전히 남아 있는 리스크
이처럼 시스코는 다양한 분야에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리스크 요인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변수가 바로 끊임없이 바뀌는 관세 정책이다.
시스코의 신임 CFO 마크 패터슨은 실적 전망과 관련해 “일부 관세에 대한 명확성은 확보했지만, 여전히 복잡한 환경 속에서 운영되고 있다”라며 “이번 1분기와 2026 회계연도 가이던스는 현재의 관세 및 면제 조치가 연말까지 유지된다는 전제하에 설정됐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최근 행정부의 관세 정책을 감안하면 이는 상당한 가정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시스코는 세계 최고 수준의 공급망을 갖춘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에 따라 관세 결정의 급변에 어느 정도 대응력이 있다. 실제로 시스코는 공급망 부문에서 여러 차례 수상 경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다양한 비상 대응 시나리오도 마련해 놓고 있다. 다만 예측 불가능한 ‘미지의 리스크’까지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다.
전반적으로 보면, 이번 분기는 눈에 띄는 ‘빅뱅’은 없었지만, 시스코가 전환을 이어가며 꾸준히 진전을 보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AI 분야에서는 많은 투자자들이 챗GPT와 같은 ‘극적인 순간’을 기대하지만, 시스코는 그런 서비스를 구현하는 인프라를 만드는 기업이다. 인프라는 도입 주기가 길 수밖에 없다. 시스코처럼 규모가 큰 기업에게 필요한 것은 폭발적 성장보다는, 지금처럼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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